• 일본인 납치범을 북송해준 김대중의 노벨 평화상 자격 문제

    납치지령자(김정일), 납치실행범(신광수), 납치피해자(하라 타다아키)가 확인된
    유일한 경우인데 김대중 정부는 납치범을 양심수로 규정, 북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趙甲濟         
      


  •    ■ DJ의 양심에 대한 국제수배?
     
    대한항공 폭파 북한공작원 김현희에게 일본어를 가르친 리은혜라는 여자는 일본 경찰의 조사로 일본 여인 다구치 야예코로 밝혀졌다. 그는 북한공작원에게 납치되어 끌려간 뒤 하라 타다아키라는 또 다른 일본인 피랍자와  결혼하여 함께 살았다(2002년 9월 김정일은 고이즈미에게 두 사람은 사망하였다고 통보). 하라 타다아키는 남한 출신 辛光洙가 납치해간 사람이다. 辛이 1985년 우리 안기부에 검거되어 자신의 여러 가지 범행을 자백하는 과정에서 처음 등장한 인물.
     
    일본인 납치 사건에서 납치지령자(김정일), 납치실행범(辛光洙), 납치된 사람(하라)이 확인되고 납치범이 자백한 유일한 경우이다. 앞으로 국제법정에서 북한정권의 하수인들에 대한 재판이 제기될 경우 하라 타다아키-辛光洙 관계는 범죄의 立證이 가능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辛光洙는 金正日을 만나 일본인 납치에 대한 지시를 직접 받았다고 증언했다. 북한 측도 하라 타다아키의 자료를 일본 측으로 통보하면서 「辛光洙와의 관련성에 대해서는 이후 법적인 절차가 생기면 제공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1991년 6월4일에 본 기자는 안기부 직원의 안내를 받아 대전 교도소에 가서 무기징역형을 받아 수감되어 있던 辛光洙를 면회하려고 한 적이 있다. 辛光洙는 교도관을 통해서 면회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해 왔다. 안기부 및 교도소 직원은 本人의 의사가 그러하다면 강제로 데리고 나올 수는 없다고 말했다. 기자는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있는 일본인 납치범이자 간첩인 그가 민주화 시대에 기본적 인권을 누리고 있음을 확인한 것을 위안으로 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金大中 정부는 일본 정부와 언론의 비판을 무릅쓰고 이 辛光洙를 2000년 9월에 다른 남파간첩 및 빨치산 출신 長期囚와 함께 북한으로 보냈다. 金大中 정부는 그러면서도 辛光洙가 납치해 간 하라 타다아키의 生死 확인 등 어떤 요구도 하지 않았다. 여러 문명국가 중 납치범을 돌려주면서 그가 납치해 간 사람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하지 않은 정부는 아마도 金大中 정부가 유일할 것이다. 그는 그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反인도범죄 행위를 은폐하는 데 도운 보상은 아닐 것이다. 
     
    金大中 대통령이 辛光洙를 북한으로 보내기 전에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한국정부에 再考를 요청한 사실은 없다. 일본정부는 조사요원을 보내 辛光洙를 면담하고 싶다는 의사표현은 했으나 한국 정부는 辛光洙가 그런 조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절하였다. 
     
    辛光洙의 인권을 이토록 생각해 준 金大中 정권은 왜 이 자가 납치해 간 일본인의 인권과 우방국의 처지는 무시했을까. 우리를 압제했던 일본인이기 때문에 그랬다면 이는 인종차별주의이다. 金正日이 두려워 그랬다면 이는 반역적 굴종이다.
     
    2001년 여름 일본 경찰은 하라 타다아키 납치와 관련하여 우선 辛光洙를 여권법 위반혐의로 국제형사경찰기구(ICPO)를 통하여 국제수배하면서 북한당국에 신병인도를 요구했다. 
      金正日을 재판정에 세울 수도 있었던 결정적 物證을 북한에 보내 준 金大中 대통령의 책임은 무엇인가. 범인 은닉인가? 일본 경찰이 새삼스럽게 辛光洙를 국제수배한 것은 그 성격상 金大中 당시 대통령의 양심에 대한 국제수배였다. 金大中 대통령이 놓아서 보내 준 辛光洙란 인간은 무슨 짓을 했나?
     
    1985년 6월28일자 안기부 수사 발표자료에 나타난 辛光洙의 행적을 소개한다.
     
     
      ■ 1. 사건 개요 ■
     
     ○國家安全企劃部는 1973년 7월2일부터 12년 동안 여섯 차례 일본에 침투하여 일본을 거점으로 對南 간첩활동을 해왔던 北傀 거물간첩 辛光洙(신광수ㆍ56세ㆍ북괴 노동당 소속)와 同 辛光洙에게 포섭된 후 25회에 걸쳐 국내를 출입하면서 북괴지령에 따라 간첩활동을 해온 在日교포 간첩 金吉旭(김길욱ㆍ57세ㆍ오사카 소재 의류소매상), 方元正(방원정ㆍ50세ㆍ도쿄 소재 「뉴코리안」 주점 자영) 등 세 명의 간첩을 검거하여 서울 지검에 송치하고 이들에게 포섭되어 국내에서 간첩활동을 해오다가 자수한 예비역 장교 李成洙(이성수ㆍ47세ㆍY정밀주식회사 부사장)는 자신의 죄과를 깊이 뉘우치고 자수한 情狀(정상)을 참작, 관용을 베풀어 훈방 처리.
     
     
      ▲ 1. 간첩 주범 辛光洙(56세ㆍ북괴 노동당 소속)
     
      (1) 간첩 선발경위 및 교육사항
     
      ○간첩 辛光洙는 일본 靜岡縣(시즈오카현)에서 출생, 8ㆍ15 광복 후 귀국하여 포항중학교에 재학시 소위 「2ㆍ7 구국투쟁」에 가담하여, 좌익활동을 하다가 서울로 도피하여 보성중학교 4년에 편입 수학 중에 6ㆍ25사변이 일어나자 북괴군에 자진입대, 월북한 자로서
     
      ○1954년 10월~1960년 10월(6년)간 루마니아 부카레스트 工大 기계학부에 유학하고 북괴 정무원 산하 과학원 기계공학연구소에서 10년간 연구원으로 종사하다가
     
      ○1971년 2월 북괴 인민무력부 정찰국 산하의 당시 對南공작기관인 198부대 對南간첩요원으로 선발되어 2년5개월간 청진초대소에서 간첩 밀봉교육을 받음.
     
     
      (2) 1차 일본 침투 및 임무활동사항
     
      ○198부대장 임창석으로부터 일본에 침투 후
     
      ―북송 연고 교포를 포섭하여, 在日 지하공작 토대를 구축할 것
     
      ―혁명역량이 있는 동조자를 포섭하여 입북시킬 것
     
      ―남한 및 일본의 각종 정보자료를 수집하여 보고할 것 등의 공작지령과 무전기(A-1 송수신기), 亂數암호표, 미화 2만 달러 등의 공작금품을 받고
     
      ○1973년 7월2일 북괴 공작선편으로 원산항을 출발하여, 일본 이시카와현 후게시군 사루야마(石川縣 鳳至郡 猿山) 등대 옆 해안으로 침투한 후
     
      ―在北시 포섭대상으로 선정한 북송연고 재일교포인 오사카시 이쿠노구 모모다니초(大阪市 生野區 桃谷町)에 거주하는 洪庚生(홍경생ㆍ65세ㆍ여)을 찾아가
     
      ―1961년에 북송되어 당시 황해북도 사리원 도시시설사업소 기사로 있던 그녀의 외아들 이진배(45세)의 자필서신과 사진을 제시하고
     
      ―만약 협조치 않으면 在北中인 이진배의 신상에 좋지 않다고 협박, 포섭하여 洪庚生의 집에 은신거점을 마련하고
     
      ○1973년 7월 하순 洪庚生의 주선으로 조총련계 김차훈(51세)의 집으로 은거지를 옮긴 후
     
      ―인근 지역 소재 비닐신발 부품공장의 배달원으로 1차 위장취업하여
     
      ―同 공장 공원인 濟州 출신 密航 도일자 최모(35세), 박모(40세) 등을 포섭 기도하고
     
      ○1973년 9월 하순에는 김차훈의 주선으로 그의 장인 殷武岩(은무암ㆍ79세)이 관리 중인 나가노현 치이사가타군 다케이시무라(長野縣 小縣郡 武石村) 관광지의 有料도로 통행료 징수원으로 위장 전직한 후
     
      ―1960년 1월에 북송되어, 신의주 화학섬유공장 지사로 있는 「殷」의 차남 殷曜安(은요안ㆍ43세)의 신상에 해로울 것이라는 협박과 회유로 殷武岩을 포섭한 후
     
      ―1974년 6월 在南 同生인 殷某(72세)를 유인 도일케 하여 포섭을 기도하였으며
     
      ○1976년 2월에는 조총련 교포 殷正雄(은정웅·55세)을 만나, 그의 주선으로
     
      ―조총련계 교포인 高基元(고기원ㆍ52세)을 포섭하고
     
      ―高基元을 통하여 또다시 前 조총련 오사카 초급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다가 신병으로 퇴직 후 오사카에서 의류소매상을 하고 있는 金吉旭(김길욱·57세)에게 접근하여
     
      ―동인의 在北 처남 이재희(37세)의 신상을 위협하는 등 동일한 수법으로 포섭하여
     
      ㆍ民團에 위장 전향하여 남한에 자유 왕래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것
     
      ㆍ남한에 있는 친척과 친구들을 포섭, 지하망을 구축할 것 등 간첩활동을 지시.
     
     
      동거녀 朴春仙의 증언
     
      <편집자 注: 1973년 무렵 辛光洙와 동거했던 在日 동포 여인이 있다. 朴春仙씨는 도쿄 메구로에 살고 있었다. 폭행을 일삼는 남편을 피해 아이들을 데리고 家出한 상태였다. 知人은 辛光洙를 사카모토(坂本)라고 그녀에게 소개하면서 『북해도 사람인데 도쿄에서 장사를 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고 한다. 2층 가옥에서 사카모토는 2층, 1층에는 朴씨 가족 네 명이 살았다. 집세는 사카모토가 내고 식사와 세탁은 朴씨가 맡았다.
     
      朴씨의 증언에 따르면 사카모토는 2층으로 아이들을 불러 잘 놀아주었다고 한다. 중학교에 다니는 큰딸에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는데 발음이 좋았다. 외국어를 몇 개나 아느냐고 물었더니 영어, 일어, 러시아어, 루마니아어, 중국어를 안다고 했다. 사카모토는 거의 외출하지 않고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외출할 때는 책방에 자주 갔다. 그럴 때는 꼭 朴씨를 데리고 가곤 했다. 1976년 사카모토는 朴씨를 규슈 미야자키 해안으로 데리고 갔다.
     
      그의 가방에 카메라, 라디오가 들어 있는 것을 보고 朴씨는 처음으로 이 사람이 간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미야자키 아오지마 해안에 도착한 그는 돌연 헤드폰을 쓰더니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이었다. 사카모토는 朴씨를 먼저 도쿄로 돌려보낸 뒤 며칠 뒤 나타났다가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金正日로부터 직접 일본인 납치 지시 받다
     
      (3) 북괴 복귀 후 再침투 활동
     
      ○(辛光洙)는 1976년 9월12일 북괴의 소환에 따라 일시 복귀하게 되자 간첩 金吉旭에게
     
      ―앞으로 북괴 공작원의 접선연락이 있을 테니 그 지시에 따라 입북하라고 지시하고
     
      ―간첩 金吉旭의 안내로 도야마현 나메리가와시 하야츠키가와(富山縣 滑川市 早月川) 하류 해안에 도착, 대기 중이던 북괴공작선과 접선 복귀하였으며
     
      ○북괴에 소환된 간첩 辛光洙는 당시 북괴 對南공작 담당비서인 金仲麟(김중린)과 조사부장 李完基(이완기)에게 그간의 在日활동 상황을 보고한 후
     
      ―평양용성5호 초대소 및 순안4호 초대소에 수용, 3년7개월간 재차 간첩 밀봉교육을 받고
     
      ―金正日의 3호 청사 집무실에서 金正日로부터 『일본인을 납치하여, 北으로 데려오고 일본인의 신원사항을 완전히 익혀 일본인으로 완전변신한 후 在日 對南工作 임무를 계속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고
     
      ―암호해독용 책자 2권, 暗書用 시약 1봉, 미화 1만 달러 등의 공작 금품을 받아
     
      ―1980년 4월 남포항에서 북괴공작선으로 출발, 일본 미야자키현 휴가시(宮崎縣 日向市) 해안으로 2차 침투.
     
     
      다시 나타난 사나이
     
      <편집자 注: 사카모토가 사라진 지 한 달쯤 뒤 朴春仙씨 앞으로 평양에 있는 주소지로부터 편지가 한 통 날아왔다. 사카모토로부터 「맡겨 둔 400만 엔을 돌려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가 도착한 것이다. 朴씨는 그 돈을 친구한테 맡겼는데 친구가 도박으로 다 날려버린 뒤였다. 朴씨는 이런 사정을 적어서 평양에서 아나운서로 일하고 있던 오빠에게 보냈다. 사카모토를 만나서 설명을 잘 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 후 朴春仙씨의 여동생이 평양으로 가서 오빠를 만났다. 오빠가 사카모토, 즉 辛光洙를 만나려고 하다가 북한 경찰에 발각되어 미행당하는 등 곤란을 겪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카모토는 1981년 다시 朴春仙씨를 찾아왔다. 그때는 하라타다아키라고 이름이 바뀌어 있는 것이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