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한국의 우파는 보수가 아니고 한국의 좌파는 진보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한국 우파엔 보수주의자가 지녀야 할 품위 있는 철학이 없다. 그 대신 개화파의 DNA를 이어받아 대외 지향적이었고 엄청나게 빠른 사회변화를 이끌어낸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집단이었다.

    반면 한국 좌파의 뿌리는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수구파였기에 반(反)국제주의를 표방했다. 그래서 퇴행적이고 폐쇄적인 모습을 자주 띠었다. 그러나 그들은 폐쇄적 민족주의와 대중영합주의라는 강력한 무기를 결합시켜 사회 내의 진지를 견고하게 구축했다.

    10여 년 전 대선에서 참패한 좌파 친노 세력이 자신을 폐족(廢族)이라 지칭할 정도로 무너졌지만 지금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미래는 알 수 없고 꺼진 불도 다시 봐야 하는 게 한국 정치이지만 한국 우파는 재기가 의심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갖고 있다.

    그들은 산업화를 이뤄놓고 나서 대안을 내놓는 데 안이했다. "잘살아보세" 이후에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별로 없다.

    정치 세력으로서 우파에게 제일 큰 관심은 자신들의 재선(再選)과 권력 유지인 듯도 보인다. 대중영합주의에 결연히 맞서 싸운 마거릿 대처의 결단력과 철학도 없다.

    데이비드 캐머런의 유연성도 없다. 캐머런은 영국 노동당이 블레어리즘이란 '제3의 길'로 새 모습을 보이고 집권하자, 변화한 노동당의 장점을 흡수하며 "따듯한 보수", “큰 사회 (Big Society)” 를 기치로 변신해 보수당 집권에 성공했다.

    그동안 한국 우파엔 위기 때마다 대개 좌파 운동권 출신 인재들이 혜성처럼 갑자기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은 일정 역할을 한 이후 사라지는 일회성이어서 지속성이 미약했다.

    요즘 우파 지식인 사회와 시민단체에서 내놓는 여러 담론을 보면 '한국자유회의'를 제외하고는 높은 수준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인재의 중요함도 모르고 사람을 끌어다 소모품으로 쓰기에 바빴고 새로운 리더군(群)을 형성하는 데 실패했다. 김부겸·김영춘과 같은 여권의 차세대 리더들, 그리고 손학규 같은 현재 리더가 현 야당 전신인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게다가 우파 정치권은 김문수 같은 내부 자원도 제대로 활용할 줄 몰랐다.

    이런 상태에서 이스라엘 우파 정당인 리쿠드당의 새 지도자 육성법은 교훈이 될 법하다. 이츠하크 샤미르 전 총리와 같은 리쿠드당 리더들은 기존의 노쇠한 지도자로는 노동당의 시몬 페레스에게 대적하기에 역부족임을 실감했다. 그래서 유엔 주재 대사 경력밖에 없는 젊디젊은 베냐민 네타냐후를 발탁해서 차세대 지도자로 키웠다.

    결국 네타냐후는 1996년 46세 때 총득표 1% 차로 페레스를 제치며 이스라엘 역사상 최연소이자 이스라엘 땅에서 태어난 첫 총리로 등극했다. 그는 현재 67세 나이로 두 번째 임기 이스라엘 총리로 재직하고 있다. 지도자감 젊은이를 과감히 발탁해 최고 지도자로 키워낸 것이다.

    한국 우파 정치권에 필요한 것은 이런 비전과 과감함이다. 불행히도 그런 능력을 갖추고 있지 못한 듯하다.

    도지사 시절부터 합리적인 우파정책을 뚝심있게 펼쳤던 홍준표 후보가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가 되면서 그나마 득표율 24%를 얻고 안철수 후보를 제치는 '실버크로스'가 가능했다.

    그는 패기있고 이념적으로 준비된 후보였다. 다른 후보가 나왔으면 20% 미만 3등에 머물렀을 것이다. 하지만 홍 후보가 스스로 잘 표현한 대로 구여권의 대선 후보는 '초상집 상주' 역할밖에 할 수 없었다. 그나마 그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런 그에게 선거 패배의 책임을 묻는 것은 한심한 처사이다.

    그러나 그도 이제 젊지 않은 나이이다. 그에게 씌워진 거친 독불장군 이미지는 파이터로서는 유효했으나 망가진 당을 추스르고 이끌어갈 리더십이란 점에서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젊은 세대는 이제 강골검사·모래시계 검사 홍준표의 활약상에 대해선 거의 모른다. 확실한 사실은, 한국당은 이제 당권에 연연할 때가 아니고 새로운 지도자군을 키워야 할 때라는 것이다.

    한국 우파에 유리한 사실은 세계사의 조류가 우군(友軍)이라는 것밖에 없다. 한반도에서 냉전과 끔찍한 공산 전체주의를 종식하고 자유통일로 나아가는 것은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여기에 역행하는 친북·종북세력과 다수 국사학계는 급속하게 역사의 유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 믿으며 사는 것은 감 떨어질 날을 기다리며 감나무 밑에서 입만 벌리고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좌파의 '헛발질'에 편승해서 이기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현 정권이 우파의 자멸로 집권했기에 그 전에 자기 혁신의 과정을 거치지 못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외생적인 충격이 새로운 동력을 마련해줄지 몰라도,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선 기회가 와도 그것을 잘 활용하기 어렵다.

    자기 힘으로 새로운 동력을 얻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속히 젊고 유능한 지도자들을 키워야 한다. 그 과정은 예상보다 어려울 것이며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강규형 명지대 교수/한국현대사.

    ※이 글의 원문은 조선일보 6월12일자에 실린 필자의 칼럼 <차세대 지도자를 육성도 못하는 한국 우파>로, 필자가 직접 수정증보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