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 신문사항만 500개, 상당수 중복 질문에 맥 빠진 분위기
  •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 사진 뉴시스
    ▲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 사진 뉴시스


    이재용 부회장 등 삼성그룹 전현직 임원진에 대한 뇌물공여 등 혐의 35차 공판이 열린 4일 서울중앙지법 510호 소법정. 공판이 1주일에 많게는 4번, 적게는 2번 이상 매주 열리면서, 이 사건에 대한 언론의 관심은 당일 나오는 증인의 존재감 혹은 지명도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이날 법정은 아침부터 붐볐다. 동시에 진행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최서원(최순실)-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뇌물공여 사건과 일정이 겹치면서, 두 사건을 심리하는 재판부는 중앙지법에서 규모가 가장 큰 417호 대법정을 번갈아 사용하고 있다.

    이날 이재용 부회장 공판의 증인은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청와대에 입성해, 운명을 같이 한 안 전 수석은, 공판에 출석한 증인 중 손에 꼽을 만한 거물이다.

    당연히 법정은 취재기자들로 가득 찼다. 박 전 대통령 사건이 같은 날 같은 시각 417호 대법정에서 속행되면서, 이재용 부회장 공판은 510호 소법정에서 열렸다.

    안종범 전 수석의 출석으로 관심이 집중된 탓에 평소보다 기자와 방청객의 수가 늘어났지만, 대법정의 3분의1 크기에 불과한 소법정에서 공판이 열리면서, 내부의 공기는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서 땀이 흐를 만큼 무덥고 탁했다.

    이날 특검 측이 준비한 증인신문사항은 500여개, 변호인단도 400개가 넘는 신문사항을 준비했다. 사건을 심리하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 김진동 부장판사는, 자정을 약 30분 남긴 오후 11시30분, 증인신문을 정지하고, 5일 속행키로 했다.

    특검의 주신문은 같은 날 저녁 8시가 돼서야 끝이 났다.

    신문 내내 특검은 박근혜-이재용 독대과정, 미르·K스포츠재단 설립기금 출연 과정, 동계영재스포츠센터 지원 내역, 박 전 대통령과 다른 대기업 총수 사이의 독대사실, ‘안종범 수첩’의 작성 경위과 그 내용에 대한 진위 파악 등에 초점을 맞춰 질문을 쏟아냈다.

    특검 신문사항의 핵심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박근혜-이재용 독대과정에서 부정한 청탁과 대가관계에 대한 합의가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런 사실을 안 전 수석이 알고 있었으며, 이를 금융위와 공정위, 국민연금 등에 지시·하달했는지 여부다.

    특검은 위 두 가지 사항의 입증을 위해, 사실상 같은 내용의 질문을 표현만 달리해 반복적으로 물었다. 반면 안 전 수석은 핵심 신문사항에 대해 대부분 “모른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이 없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요점을 파악하기 힘들만큼 긴 질문과 ‘모른다’는 짤막한 답변이 계속 오가면서 법정 내부의 긴장감은 빠르게 이완됐다. 특검의 중복 질문으로 공판시간이 크게 늘어나자, 재판장이 직접 나서 “모른다고 하는데 넘어가자”며, 신속한 공판 진행을 당부하기도 했다.

  • 법정에 들어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사진 뉴시스
    ▲ 법정에 들어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 사진 뉴시스


    피고인석에 앉은 이재용 부회장은 이날도 변함없이 노란색 서류 봉투를 들고 나왔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흰색 셔츠에 검은색 정장을 입은 그는, 증인으로 출석한 안종범 전 수석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는 가끔 왼쪽에 앉은 변호인과 귓속말을 나누거나, 종이컵에 담긴 물을 마실 뿐, 특별히 눈에 띨만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안종범 전 수석도 이재용 부회장과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안 전 수석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한 쪽 다리를 절뚝였다.


    ◆주신문 사항만 500개 준비한 특검, 중복 질문에 맥 빠진 분위기

    특검은 안종범 전 수석의 수첩에 적힌 메모를 기초로, 박 전 대통령이 이재용 피고인과의 독대 직후, 삼성 측 현안을 챙길 것을 지시한 사실이 있는지를 캐물었다.

    특히 특검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당시 대주주인 국민연금이 찬성표를 던지게 된 과정에 청와대의 개입이 있었는지 여부, 통합삼성물산 출범 후 불거진 순환출자고리 해소 과정에 역시 청와대의 압력이 있었는지 여부, 삼성생명의 금융지주회사 전환 시도를 독대의 결과물로 볼 수 있는지 여부, 삼성바이오로직스에 대한 특혜 지원을 박 전 대통령이 직접 지시했는지 여부 등을 거듭 질문했다.

    반면 안종범 전 수석은 특검의 신문에 대부분 부정적 답변을 내놨다.

  • 삼성물산 현관. ⓒ 사진 뉴시스
    ▲ 삼성물산 현관. ⓒ 사진 뉴시스


    삼성물산 합병 문제에 대해서는 ‘개별기업의 사안으로 경제수석이 개입할 사안 자체가 아니었고’, 이와 관련해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지시는 물론 어떤 언질도 받은 사실이 없다고 했다.

    순환출자고리 해소나 삼성생명의 금융지주회사 전환과 관련된 사안에 있어서도, 안 전 수석은 같은 취지로 답변했다.

    다만 안 전 수석은 통합삼성물산 출범 후 순환출자고리 해소를 위해, 삼성 계열사들이 처분해야 할 주식 물량을 900만주에서 500만주로 축소한 사실과 관련해, “공정위원장과 부위원장의 의견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보고 받았으며, 시장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신속한 결정이 필요하다는 뜻을 전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안 전 수석이 ‘박근혜-이재용 독대’ 당시 배석했는지를 묻는 특검의 질문은 법정의 맥 빠진 분위기를 잠시나마 환기시켜줬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기대 밖이었다.

    안 전 수석은 박 전 대통령과 이재용 부회장 사이 3차례 독대 과정에 단 한 차례도 배석한 사실이 없다고 증언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과 대기업 총수 간 면담에 잠시나마 배석한 경우는 SK 최태원 회장과의 독대가 유일하다고 했다.

    그는 당시 독대에 참석한 이유를 묻는 특검 측 질문에 “(최태원 회장이) 아이디어를 냈는데 와서 한 번 들어보라고 해서  10분 정도 자리했지만, 그것도 배석이라고 말하기는 뭐하다”고 덧붙였다.


    ◆ ‘단어’만 나열된 안종범 수첩, 기록한 당사자조차 기억 못해

    이날 특검의 신문사항은 예리한 맛이 떨어졌다. 오히려 피고인 측 변론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보이는 신문사항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안종범 수첩’의 메모 기재방식과 그 내용이다.

    특검의 신문을 통해 드러난 ‘안종범 수첩’의 기록형태는 예상한대로, ‘문장’이 아니라 ‘단어’의 나열이었다.

    그것도 단편적인 단어가 두서없이 이어져 있어, 내용을 기록한 당사자인 안 전 수석이 아니라면 그 뜻을 유추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더구나 안 전 수석은 본인의 관장 업무 이외의 문화·스포츠 관련 사항은, 박 전 대통령과의 통화내용을 그냥 적어 놓았을  뿐 나중에 다시 본 적이 없어, 당시에 그런 내용을 기록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대기업 총수와의 독대 후 박 전 대통령의 ‘말씀’을 기록한 경우에도, 중요 단어만을 나열하는 기록 방식의 특성 상, 발언자가 박 전 대통령인지, 상대방인지 구분하는 것도 어렵다고 했다.

    예를 들어 이날 특검이 제시한 안종범 수첩의 일부를 보면 아래와 같다.

    센터 펀드 감사,
    고택 명물화→에꼴페랑디,
    기후변화 ESS,
    바이오 신산업,
    금융지주회사,
    글로벌 금융,
    은산분리,
    아프리카 프랑스 이란 미얀마 몽골 ASSEM,
    새마을운동 제대로, 삼성 역할,
    미르·K스포츠,
    중국 1조,
    빙상 승마,
    JTBC,
    외투기업, 세제혜택,
    싱가폴, 아일랜드,
    글로벌제약회사 유치,
    SS운영.

    나열된 단어만 놓고 보면,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박 전 대통령의 의중 역시 좀처럼 가늠하기 힘들다.

    2015년 7월27일 박 전 대통령과의 통화 내역을 기록한 안종범 수첩의 다른 부분도 위 기재형태와 거의 비슷하다.

    VIP,
    삼성 엘리엇 대책,
    M&A 활성화,
    소액주주 권익,
    글로벌 스탠다드,
    대책 지속 강구.

    단어만 보면, 박 전 대통령이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에 반대한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의 움직임에 대해, 소액주주 권익 보호 차원에서 이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한 것인지, M&A 활성화는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글로벌스탠더드의 말뜻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안 전 수석은 위 수첩 기재사항의 내용을 기억하는 대로 진술해 보라는 특검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기억은 못하겠다. 그렇지만 이 상황을 봤을 때는, 대책을 지속적으로 강구하라고 말씀하신 것만 봐도, 앞으로 M&A가 계속적으로 일어날 가능성이 있고, 외국자본이 이런 식으로 옮겨갈 것 대비해서 대책을 만들라는 내용으로 인식한다.”

    안종범 수첩은, 특검이 ‘부정한 청탁의 대가’ 가운데 하나로 판단한 ‘동계영재스포츠센터 지원’과 관련해서도, 박 전 대통령이 장시호나 최순실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계영재스포츠센터 관련 안종범 수첩 기록.

    메달리스트 빙상협회 후원.
    동계스포츠 선수 양성 방안.
    메달리스트.
    스케이트, 스키 영재발굴 훈련.
    삼성 지원 스케이트 5억 지원.

    위 내용에서 알 수 있는 사안은, 박 전 대통령이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메달리스트와 빙상협회에 대한 후원, 영재 발굴 및 훈련 등에 관심을 표했으며, 삼성이 이를 위해 5억원을 지원한다는 내용 정도다.


    ◆“박 전 대통령...삼성 합병 관련, 지시는 물론 질문도 안 해”

    안 전 수석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현안에 대해, “박 전 대통령으로부터 일체의 지시나 질문을 받은 사실이 없다”며, 대통령의 외압 의혹을 전면 부인했다.

    변호인단은 재판부에 낸 의견서를 통해, 안종범 수첩의 증거능력에 강한 의문을 나타냈다.

    “수첩 중에서 대통령이 안종범에게 말한 내용을 기재했다는 부분은 증거능력이 성립되지 않는다. 원진술자인 대통령의 진술이 요건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이재용으로부터 들은 내용을 다시 안종범에게 알린 것으로, 증거능력을 인정할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