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문화적 격차 무시하고 ‘1:1 동등한 통일’ 추진한 결과 25년째 내전 상태
  • 2014년 3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 참석해 '통일대박론'을 펼치는 박근혜 前대통령. ⓒ뉴데일리 DB.
    ▲ 2014년 3월 스위스 다보스 포럼에 참석해 '통일대박론'을 펼치는 박근혜 前대통령. ⓒ뉴데일리 DB.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한반도 통일을 연구하면서 주체 세력을 떠나 성공 사례만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사람은 실패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법이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두 번씩이나 통일을 시도했지만 사전 준비 부족으로 실패한 나라도 있다. 지금도 내전을 치르고 있는 예멘이다.

    100년 넘게 이어졌던 예멘의 분단

    예멘은 아덴만과 홍해의 길목에 있는 지정학적 요충지의 국가다. 예멘 분단의 역사는 19세기부터 시작됐다.

    1299년 건국한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18세기 말까지도 지중해 주변의 강국이었다. 예멘은 1517년 오스만투르크 제국에게 정복당했다. 300년 뒤인 1839년 영국은 제국주의 활동을 하면서 남부 항구도시 아덴을 비롯한 예멘 남부 지역을 점령한다. 이때부터 남예멘과 북예멘으로 나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18년 전쟁이 끝나면서 독일 편에 서서 참전했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식민지 대부분을 잃게 된다. 이때 점령당했던 예멘은 ‘예멘 무타와킬 왕국’이라는 나라로 독립한다. 이슬람 교리를 따르는 왕조 국가였다. ‘예멘 무타와킬 왕국’은 1962년9월에 일어난 쿠데타로 내전을 겪으면서 사라졌다. 당시 이집트 나세르 정권의 지원을 받은 군인들은 ‘예멘 아랍 공화국’을 수립, 아랍 사회주의에 기반을 둔 군사독재국가를 만든다.

  • 1990년 통일 전 예멘 지도. ⓒ알터너티브 히스토리 닷컴 화면캡쳐.
    ▲ 1990년 통일 전 예멘 지도. ⓒ알터너티브 히스토리 닷컴 화면캡쳐.


    한편 남예멘은 196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다. 독립 이후 소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남예멘은 사회주의 세력이 급성장한다. 1969년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호를 ‘예멘 인민민주 공화국’으로 정한다. 국제사회에서는 두 개의 예멘을 구분하기 위해 ‘남예멘’과 ‘북예멘’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남예멘의 공산주의 정권은 1970년부터 북예멘과 통일 협상을 시작한다. 남북 예멘은 1972년 카이로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통일을 추진한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1977년 북예멘 대통령 암살사건, 1979년 국경 분쟁 등으로 통일을 위한 협상은 계속 늦어진다.

    당시 남북 예멘의 통일 협의가 비교적 빠르게 진행된 것에 대해, 국제사회는 남예멘의 공산주의 계획경제가 실패하면서 내부 갈등과 불안이 고조되자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풀이한다. 아무튼 남북 예멘 간의 통일 협의를 계속 이뤄졌지만 그 성과는 1990년 5월 22일에야 나온다. 양측 정부는 합의를 통해 ‘예멘 공화국’으로 통일한다고 선언한다.

    예멘 통일의 실수: 인구·경제 무시한 남북 동수의 권력 배분

    예멘의 통일이 나름대로 빠르게 이뤄진 배경에는 북예멘의 양보가 큰 몫을 했다. 당시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체제였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를 따르던 북예멘은 인구도 훨씬 많고, 경제력 또한 더 컸음에도 남예멘 측에 수상, 부통령 등을 양보한다. 통일 예멘의 수도 또한 정치 수도는 북부의 ‘사나’에, 경제 수도는 남부의 ‘아덴’으로 정했다.

    통일 예멘 의회는 301석 가운데 남예멘이 110명, 북예멘이 159명, 무당파가 31명이었고, 각 부처 장관 또한 북예멘 19명에 남예멘 15명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물론 대통령은 1977년 대통령 암살 이후 집권, 1982년부터 일당 독재를 하던 알리 압둘라 살레가 맡았지만, 수상은 남예멘 대통령 ‘하이더 아부 바크르 아타스’가, 부통령은 ‘알리 살림 알-비드’ 남예멘 사회당 서기장이 맡았기에 불공평하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통일한 예멘은 처음에는 별 탈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남예멘 인근해에서 유전을 발견하면서 국민들도 산유국이 될 희망에 부푼다. 하지만 1990년 8월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 점령한 뒤에 문제가 터진다. 통일 예멘이 쿠웨이트가 아닌 이라크 편을 든 것이다.

    당시 북예멘의 살레 대통령은 ‘대국민 회의’라는 아랍 민족주의 정당을 이끌고 있었고, 남예멘 또한 공산주의 체제이기는 했지만 ‘아랍 민족적 사회주의’를 표방했기에, 범아랍주의를 내세우는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바트당과 ‘코드’가 일치했던 것이다.

    통일 예멘이 이라크 편을 들자 미국과 사우디아리비아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 이슬람 국가들이 경제 제재를 시행한다. 국민들은 물론 정부 재정이 급격히 악화됐고, 결국 산유국 꿈도 물거품이 된다.

    이후 예멘에서는 경제적·문화적 차이 때문에 남북 지역 간의 갈등이 심해진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엄격한 이슬람 율법을 적용하는 왕정 체제와 이후 이어진 군사독재체제에서 살아왔던 북예멘 사람들과 영국의 지배 아래 있으면서 세속적으로 변한 남예멘 사람들 사이의 정서적 간극은 경제가 악화되면서 더욱 벌어졌다.

  • 2011년 촬영한 예멘 제1기갑사단 의장대. 무력으로 통일한 예멘은 압도록 힘으로 남예멘을 장악했다.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 2011년 촬영한 예멘 제1기갑사단 의장대. 무력으로 통일한 예멘은 압도록 힘으로 남예멘을 장악했다. ⓒ위키피디아 공개사진.


    이 와중에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남예멘을 기반으로 한 ‘예멘 사회당’을 억압하자 문화적 차이로 인한 갈등은 정치·군사적 갈등으로 비화한다. 결국 통일 합의 4년만인 1994년 내전이 일어난다. 하지만 내전은 두 달 만에 끝난다. 북예멘의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이 남예멘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강했기 때문이다. 북예멘은 남예멘이 수도로 삼았던 아덴을 점령한 뒤 ‘흡수 통일’은 선포한다. 두 번째 통일이었다. 남예멘 사람들의 감정은 더욱 악화됐다.

    문화·정서적 통합 없는 통일의 결말, 끝없는 내전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은 무력 통일을 이룬 뒤에도 17년 더 집권한다. 그가 1978년 쿠데타 이후 33년 동안의 집권을 끝내게 된 계기는 ‘재스민 혁명’이었다. 

    예멘의 정정 불안은 사실 2004년부터 조짐을 보였다. ‘후티 반군’ 때문이었다. ‘후티 반군’은 1992년 통일 예멘의 수도 ‘사나’에서는 시아파 분파인 ‘자이드’ 파 부흥운동이 시작됐다. 이를 주도한 ‘후세인 알 후티’와 ‘모하메드 알 후티​’의 이름을 따 ‘후티 운동’이라 불린다.

    ‘후티 운동’은 이후 10년 넘게 조용히 움직였고, 주변의 수니파 사람들과도 별 다른 갈등 없이 지내 평판도 나쁘지 않았다. 이런 ‘후티 운동’이 과격하게 변한 것은 2003년 3월 이라크가 미국의 침공을 받은 뒤 사담 후세인 정권이 무너진 것, 여기에 반발한 ‘후티 운동’ 지도자를 정부에서 사살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은 ‘바쓰 당’이라는 아랍 통일 사회주의 성향의 정당을 이끌고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이 시아파였다. 미국이 시아파 정권을 끝장냈다고 본 ‘후티 운동’ 세력은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은 살레 정권에 반발하기 시작한다. 살레 대통령이 시아파 교도라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시아파 국가가 무너진 것에 더 흥분했다.

    이 같은 불길에 기름을 끼얹은 사건은 2004년에 일어났다. 살레 정권이 ‘후세인 알 후티’가 반정부 투쟁의 지도자라며 체포를 시도하다 사살한 것이다. 이때부터 종교 운동단체이던 ‘후티 운동’은 무장반군으로 변신한다.

    ‘후티 반군’은 예멘 북부 사다州를 거점으로 주변 지역을 조금씩 점령한다. 이후 북예멘 일대에서 정부군 병력까지 흡수하며, 그 규모를 20만 명까지 키웠다. 예멘 정부군과 ‘후티 반군’이 벌인 내전으로 수십만 명의 난민이 생기고, 경제는 추락한다.

    예멘 내전은 2009년 들어 사우디아라비아 일부 지역에까지 번진다. 예멘 내전을 지켜보던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는 같은 해 11월 참전을 선언, ‘후티 반군’과 전투를 벌인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참전으로 압박을 느낀 예멘 정부와 ‘후티 반군’은 2010년 2월 휴전에 합의한다.

  • 2014년 8월 후티 반군 지지자들의 시위. ⓒ알 자지라 관련보도 캡쳐.
    ▲ 2014년 8월 후티 반군 지지자들의 시위. ⓒ알 자지라 관련보도 캡쳐.


    예멘 국민은 물론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GCC 회원국들은 이제 안정을 찾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2011년 북아프리카와 이집트를 휩쓴 ‘재스민 혁명’의 바람이 예멘에도 불어 닥친 것이다.

    내전 이후에도 철권통치를 하는 살레 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재스민 혁명’에 용기를 얻어 2011년 6월 대통령궁을 습격한다. 이로 인해 살레 대통령은 부상을 입고 도망치고,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부통령이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는다. 시위대는 정권이 완전히 바뀌는 게 아니라 대통령만 바뀌자 폭력 시위를 멈추지 않는다.

    이후 걸프협력회의(GCC) 6개국이 다시 양측 사이에서 중재를 한다. 살레 대통령은 결국 2012년 2월 모든 권력을 내려놓는다. 다음 대통령은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부통령이 단독 입후보해 선출됐다. 이제는 예멘 정정도 안정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2014년 ‘연방제 개헌’을 두고 다시 갈등이 시작된다. 예멘을 6개 자치주로 나눠 연방국가로 만드는 안이었다. ‘후티 반군’의 거점이던 북예멘은 연방제를 실시할 경우 유전도 없고, 무역항도 없는 북부 지역은 경제적으로 소외당할 것이라고 생각해 다시 봉기한다.

    2014년 9월 ‘후티 반군’은 수도 사나로 쳐들어 가 대통령궁을 점령한다. 압드라부 만수르 하디 부통령은 결국 남부 무역항 ‘아덴’으로 피난을 떠난다. ‘후티 반군’은 2015년 2월 하디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스스로 헌법을 제정한 뒤 자기네가 선출한 151명의 대표로 ‘혁명 위원회’를 구성해 과도 정부를 세운다. ‘후티 반군’은 같은 해 3월에는 남부 ‘아덴’까지 점령한다. 결국 하디 정권은 사우디아라비아로 피신해 임시 정부를 세운다.

    수니파 종주국을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는 ‘후티 반군’을 불법 쿠데타 세력으로 간주하고 참전을 선언한다. 사우디아라비아가 나서자 GCC 회원국과 이집트 등 9개 이슬람 국가가 동맹을 결성해 예멘 내전에 참전한다. 그러자 시아파 종주국을 자처하는 이란이 ‘후티 반군’에게 각종 무기와 물자를 지원하고, 비공식적으로 병력을 보내 맞선다. 성급한 통일의 결과가 20년 동안의 내전,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국제전쟁이 돼 버린 것이다.

    한반도 통일, 예멘 내전에서 배울 점 없을까

  • 후티 반군들의 집단 무력시위.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 뉴스 관련보도 캡쳐.
    ▲ 후티 반군들의 집단 무력시위. ⓒ러시아 관영 스푸트니크 뉴스 관련보도 캡쳐.


    먼 나라 예멘의 통일과 내전을 보면, 한반도와는 별 관련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 체제와 70년 이상 이어진 김씨 왕조 우상화 교육을 생각하면 공통점이 적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남예멘과 북예멘은 각각 영국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고,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운 사회주의 정권과 군사독재정권 아래에서 오랜 기간을 보낸다. 양측 간의 경제력 격차도 심했고, 남북 간 국민들의 정서와 문화적 차이가 컸다. 군사력 또한 마찬가지였다.

    현재 한반도는 어떤가. 경제력으로 한국은 북한의 40배에 달할 정도로 비교가 되지 않는 격차를 보이고 있다. 군사력으로는 북한이 핵무기와 1,800여 기에 달하는 탄도미사일, 12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다. 전면전이 일어난다면 한미 연합군의 전력이 북한을 압도하겠지만, 만약 예멘과 같은 내전이 일어난다면 한국군이 북한군을, 북한군이 한국군을 순식간에 제압할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예멘 내전이 일어나는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를 중심으로 한 GCC 회원국, 이란의 개입은 마치 한반도 전쟁 발발 시 미국, 영국, 호주, 일본 등 서방 진영과 중국 간의 대결 가능성을 떠올리게 한다.

  • 2014년 12월 YTN이 보도한 남북 소득격차. 예멘이나 독일은 이렇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YTN 관련보도 화면캡쳐.
    ▲ 2014년 12월 YTN이 보도한 남북 소득격차. 예멘이나 독일은 이렇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YTN 관련보도 화면캡쳐.


    한반도가 통일이 된다고 해도 남북 민간 교류를 전면 허용하면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도 양측 간의 엄청난 격차 때문이다. 교육, 생활, 소득, 지식, 기술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심각한 격차를 보이는 남북한 사람이 갑자기 뒤섞여 살게 되면, 사회적 갈등은 독일이 아니라 예멘 이상으로 심각한 양상을 보일 수도 있다. 솔직히 말해보자. 우리는 못 입고 못 먹고 못 사는 북한 주민들을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나와 같은 수준으로 대우할 것이라고 자신하는가.

    이런 점 때문에 통일이 언제 될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통일이 될 때를 대비한,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계획과 시나리오, 이에 소요될 자원과 조직 등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남북한보다 격차가 훨씬 적었던 독일이 통일을 위해 준비한 시간이 20년 가까이 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 이후 20년 넘게 양측 모두 고생했던 점에서 ‘뭔가’를 배워야 할 것이다.

    ‘⓺ 한반도 통일: 연방제 통일이냐, 북한 체제 붕괴냐’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