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남 철수에 북한동포 실어달라" 이승만, 맥아더에 요청한 증언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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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④ 휴전론과 맥아더 해임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 포럼 대표6.25전쟁의 휴전 문제는 바로 김일성의 남침 직후부터 튀어나왔다.미국 트루먼의 한국 파병안이 유엔을 통과한 직후 6월29일 영국은 서둘러 소련주재 대사에게
훈령을 내렸다. 모스크바 영국대사 데이비드 경이 소련측에 한반도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타진하자 그로미코는 구체적 안을 요구했고, 영국은 미국에 ‘중공의 유엔 가입’ 댓가로
한반도 원상회복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애치슨 국무장관은 단호히 거부한다.인도 정부도 영국을 거들고 나섰다. 네루 수상의 여동생으로 주미대사인 판디트는
애치슨 국무장관을 찾아가 역시 중공의 유엔가입을 조건으로 휴전협상을 타진하지만 실패한다.9월 들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유엔군이 38선으로 진격하자 이번엔 네덜란드가‘38선상 휴전’ 안을 들이민다. 유엔 사무총장 트리그브 리도 동조하였다.
오스트레일리아도 남미 페루도 잇따라 휴전안을 제출, 유엔이 할일이 휴전 밖에 없는 듯 했다.영국은 유엔군이 북한 전역에 진격했을 때 ‘평북 정주와 함경남도 흥남을 잇는 완충지대’ 설정을 미국에 제시하고 이 선을 ‘유엔 라인’으로 이름붙여 유엔이 통제하자며 한층 적극적이었다.저마다 다른 아이디어는 ‘중국이 참전하기 전에’ 서둘러 전쟁을 끝내자는 게 초점이다.그러다가 중공군이 대거 밀고 내려와 장진호에서 미군이 악전고투 참패할 때 트루먼이
“원자탄 사용 고려”라는 방어용 협박탄을 터트린 것, 크게 놀란 영국의 수상 애틀리는
서둘러 12월4일 워싱턴으로 날아간다. 노동당 정부의 애틀리는 중국 공산당과의 협상에 자신감을 보이면서 또 다시 ‘38선 종전’안을 강력히 주장, 3일간에 걸친 협의 끝에 조기종전에 합의한다.
회담후 트루먼 대통령은 그날 일기장에 ‘환상적’(fantastic)이라고 적어놓았다.
그리고는 “동맹국과 사전협의 없이는 결코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겠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종기종전에 의욕을 가진 트루먼은 12월16일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물가와 임금통제를 단행, 새로운 국방예산 500억달러를 마련하지만, 미국 합참은 그러나 “한국이 전면전을 치를만큼
가치있는 지역이 아니다”라는 이유로 추가 파병을 거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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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동포를 구하라” 이승만이 미군에 피난 요청한 '흥남철수' 피난민들예상못한 대규모 중공군에 연패하는 맥아더의 철수 명령으로 10군단 소속 미육군 제3사단도함흥으로 집결하였다. 몰려든 주민들 속에서 대표격인 3명이 막사로 들어왔다.1950년 12월12일 낮 12시 반, 사단장 참모들을 만난 북한주민들은
함흥시 부시장 이우춘, 함흥시 남구청장 모학목, 함남 청년회장 김일성이다.
탄원서 같은 문서를 내민 그들이 침통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도와주십시오. 이대로 철수하면 우리는 다 죽습니다. 6년이나 공산당 압제를 받아온 주민들은
모두 탈출하기를 원합니다. 피란을 가지 못하면 공산군이 다시 와서 여자나 아이들까지 모조리
학살할까봐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흥남으로 가게 해주십시오. 다시 유엔군이 북진할 것으로
믿지만 일단 고향을 떠났다가 유엔군과 국군을 따라 고향에 오렵니다. 부디 우리를 남한땅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이렇게 엎드려 간절히 요청합니다.”
난감해진 미군장교는 “공무원들이 이러면 안된다. 주민들을 진정시키고 통제해야 한다”고달래면서 일단 그들의 요구를 10군단 사령부에 전달하겠다며 돌려보냈다.그때 한국인 통역관이 말했다. “이건 통역하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라면서 다가선 통역관은
사실을 넣어놓았다. 함흥 부시장 일행이 온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시킨 것이라는 것.,
한국정부 관리로서 유엔군에게 공식적으로 피란민 수송을 요청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이었다.이 은밀한 대화 내용은 미국 극동군사령부 수신메시지(1950.12.14.)에 기록되어있다.
(안재철, 생명의 항해 1권, 2015. 문서번호 X15132, 발신: 10군단장, 수신: 도쿄 극동군사령관)지난 연재기사에서 전술했듯이 이미 이승만 대통령은 북한5도 지사를 임명, 수복지역에 통일대비 행정조직을 마련해두었었는데. 뜻밖에 대규모 중공군에 패배를 거듭하는 미군이 철수하자
북한동포 피란대책을 맥아더 측에 요청했던 것이다. 맥아더는 바로 전날 일본에서 날아와 철수작전 회의를 마치고 돌아간 참이었다.이승만은 “북한 동포들은 공산당을 싫어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그동안 국군을 도와주고 대한민국에 협력한 애국남녀들을 공산군이 보복 살해할 것이 분명한데, 가능한대로 해로(海路)로 피란할 수 있도록 선박편을 최대한 주선해주기를 간청한다.”고 당부했다는 이야기이다.주민 대표들은 당장 꼭 월남해야 할 사람들은 3만명 정도라고 덧붙였다.맥아더의 명령을 받은 10군단장 에드워드 앨몬드 소장의 답신을 보면,
북한 피란민 구출과 관련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요청을 감안하여 인도주의적인 조치를 취했음”을 보고하고 “도저히 방치할 수 없는 사람들을 대한민국으로 철수 시켰고 더 많이 철수시킬 계획”이라고 다짐까지 하고 있다.당시 흥남서 크리스마스 이브까지 철수한 미군이 10여만, 피난민은 더 많은 11만여명이다.뒷날 가요처럼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 찬 흥남부두’ 거대한 엑소더스의 감동적 인간드라마가
이렇게 진행 되었던 속사정을 사실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미군의 용역계약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한명도 남기지 말자”며
작은 배에 1만4천명 피란민을 싣고 마지막으로 흥남항을 떠난 그 사진은 수많은 상도 받았다..휴전후 1955년 이승만대통령은 그때 선장 레너드 라루에게 금성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한다. -
▶스탈린, 마오에 38선 돌파 요구...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하다전투다운 전투도 없이 일방 후퇴하는 유엔군을 따라내려온 중공군 사령관 펑더화이는
마오에게 휴식을 요청한다. “38선 이남 진격 대신에 겨울동안 38선 이북에서 병력을 정돈하겠다”는 펑의 건의는 즉각 거부되었다. 마오의 명령은 “즉각 진격”뿐, 모스크바의 스탈린이 마오에게 “제체하지 말고 38선을 돌파, 남조선을 공격하라”는 지시를 내렸기 때문이었다고 한다.“현재 미-영 양국은 우리가 38선에서 정지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38선을 반드시 넘어야한다. 한강을 넘어 한국군은 반드시 멸한다.
1월중순 쯤 신병을 증원해줄 것이다. 분투하라.” 새해 1월1일 3차공세를 감행한다.길을 비켜주듯이 물러나는 유엔군을 제치고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은 4일 해질 무렵,3개월만에 서울 주인이 또 바뀌는 순간, 시민들은 전과 달리 거의 피난하여 거리는 썰렁했다.다음날 21발의 축포를 쏘며 서울점령식을 가진 김일성은 “우리 수도 해방” 포고문까지 냈고,
중국 베이징 텐안문 광장에서도 승리를 축하하는 군중이 밤까지 열광했다고 한다.
왜 안그렇겠는가,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빼앗긴 한양땅 서울을 미국으로부터 빼았지 않았는가.
역사는 돌고 돌아 55년만에 조선반도가 중국 속국으로 회복되는 기쁨은 중국만이 실감하였다. -
▶ 이승만, 트루먼에 편지 “맥아더에게 원자탄 사용권 주시오”또 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이번엔 군용기를 탄 이승만 부부는 부산 임시관저에 들었다.
이튿날 정월초 6일 부산 충무광장에서 ‘국토 사수 1백만 무장요청 총궐기대회’가 열렸다.청년들이 ‘멸공 결의 선서문’을 청년들이 낭독하였고, 유엔과 맥아더에게 보낼 멧시지도 읽었다.이승만은 중공군이 참전한 이상 타이완의 국부군을 받자며 장제스에게 5만명을 보내달라는 요청 서한을 만들었다.유엔군이 계속해서 후퇴만 하고 있다는 보고로 분통에 시달리는 이승만은트루먼 대통령에서 직접 편지를 쓰기로 하고 오래된 타이프라이터를 두드렸다.“한달전 중공군이 침입한 이래 유엔군은 철수를 계속하여 적군은 지금 수원까지 이르렀습니다.
전선을 재구축할 목적이라는 소위 ‘전략적 후퇴’는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지금처럼 적의 진군을 허용한다면 적군은 단시일내 대구와 부산에 도달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만 해도 몸서리가 쳐집니다.
적은 한국내 모든 반공적 요소들을 파괴할 것이며 살아남아 진실을 전해줄 정상적인 사람은
남아나지 않을 것입니다.더 불행한 일은 한국의 공산 침략을 막기위해 용감하게 나섰던 각하와 위대한 지도자들에게
이 재앙이 미칠 엄청난 영향입니다. 적은 모든 책임을 각하에게 돌리려 할 것이고,
소련과 그 세계 괴뢰집단들은 기뻐 날뛸 것입니다. 유엔은 또 다른 세계대전을 막지도 못하고
자신도 그 누구도 지키지 못하고 이 한국전쟁만 더욱 처참하게 만들어버리고 말것입니다.이러한 사태를 극복하려면, 우리는 바로 지금 중공 침략군을 격퇴시키고 설멸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됩니다.한국인들에게 무기를 제공하여 한국식 게릴라 전략에 따라 전쟁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맥아더 장군으로 하여금 어느 곳에든지 공산군을 막을 무기와 심지어 원자탄까지도 사용할 권한을 주시기 바랍니다. 모스크바에 원자탄 몇방이면 그것만으로도 공산세계는 충분합니다....“‘하나님께서 건강과 용기와 지혜를 각하에게 내려주시기를 기원합니다“로 편지를 마무리한뒤이승만은 동시에 장면 주미대사에게 편지를 써서 ”유엔에서 벌어지는 한국문제 논의“들에 대하여 우왕좌왕하지 말고 확고한 한국입장을 관철시키라”고 거듭 당부하였다.이승만은 장면이 ‘한국대표로서 적임자가 아니다’고 생각한지 오래였다.‘대사가 인기가 있고 우방의 신뢰를 얻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외교관은 때로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인기를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오’라는 말은 차마 못하고, “무초대사등 미국인들이 장면 박사가 국내에 들어와 중요한 일을 맡기 원한다”는 말로 바꾸었다.그후 이승만은 그래서 장면을 국무총리로 임명하여 ‘국내 소환’하였으나 장면은 몇달동안 귀국하지 않았다. 전쟁중에도 멈출 줄 모르는 야당의 정치 갈등에 이승만은 정말 지겹기만 하다.
(올리버, 이승만의 대미투쟁, 비봉출판사) -
▶ 미군 장성들에 '의식화 교육'...이승만에 반하는 이유“당신네들은 싸우러 온 것이냐? 후퇴하러 온 것이냐?”벌써 한달 넘게 ‘작전상 후퇴’라는 핑계를 대며 일사천리로 밀려 내려오는 유엔군에게분통을 삼킬수 없던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 임시경무대를 나와 대구로 날아갔다.
연말에 교통사고로 전사한 8군사령관 워커 장군 후임으로 맥아더가 점찍어 놓은 인물리지웨이 장군이 이승만을 맞이하여 환하게 웃으며 힘찬 악수를 나누고 말했다.“각하, 저는 후퇴하러 온 게 아닙니다. 북으로 진격하러 왔습니다.”의표를 찌르는 리지웨이의 말에 기분이 좋아진 이승만은 격려의 맞장구를 치고 입을 열었다.“리지웨이 장군, 귀하가 잘 싸우러면 싸울 태세를 갖춘 우리 청년들을 무장시켜야 하오.왜 50만 한국청년들에게 총을 안주는가? 미국은 우리가 언젠가 뒤에서 칼을 찌를 것이라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 군사원조도 받은 것 없이 생명을 다 바쳐서 공산군과 성공적으로 싸워 온
나라는 전세계에서 한국 뿐이오. 왜 귀하는 한국청년들을 제쳐놓고 대신 일본을 무장시켜
또 다시 일본을 열강으로 만들려고 하는거요? 아시아 여러나라들이 의구심을 갖고 있소.우리 한국이 당한 쓰라린 경험을 아시오? 잘 들어 알아두시오.
우리는 일본이 러시아와 싸울때 이 땅을 통과시켜주었더니 일본은 결코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미국의 도움을 받아 한국에 머무르며 40년동안 점령했다. 바로 당신네들 미국이
1905년 러시아와 싸우는 일본의 군비를 증강시켜 주었는데 또 다시 무장시키고 있잖은가.당신들은 언제나 한국이 아시아의 관건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보지 않으며,
그래서 그때도 미국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미국은 이 극동에서 한국을 강력한 보루로 만들어 적들을 견제하려 하지는 않고우리의 적들만 부추기고 있는 꼴이다. 만약 미국이 이 전쟁에서 패하거나 철수한다면
당신들은 또 일본을 저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말을 명심하여 들으시오.
우리청년들을 무장시켜 싸운다면 당신은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오.“이승만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미국을 위해 싸우는 미군 지도자를 ‘한국을 위해 싸우는 전사’로 만들려는 ‘의식화 교육’ 같은 것,듣도보도 못한 후진국가에 와서 왜 귀한 피를 흘려야 하는지 그 이유를 가르쳐주고깨달음과 보람과 사명감까지 심어주는 미국 박사 대통령에게 저절로 마음이 열리게 된다.
▶리지웨이 ‘천둥벼락’ 작전....마오, 소련 군사원조 따내기 장기전리지웨이의 장담은 허풍이 아니었다. 그는 곧 이승만을 기쁘게 해주었다.
중공군의 식량과 탄약이 소진되는 싸이클을 알아내어 기회를 노리던 리지웨이 장군은그의 회심의 전법 ‘천둥벼락(Thunderbolt) 작전’을 일제히 개시한 것이다.'허가된 후퇴'만 거듭하여 37도선까지 내려온 유엔군이 모처럼 돌아선 대규모 반격작전이었다.
전술가 리지웨이는 그때까지 중공군이 선두의 한국군을 깨고 후방 미군을 포위공격한다는 패턴을 정확히 파악하여 보란 듯이 미군을 전면에 내세우고 부대를 동서남북 전후로 배치, 중공식 전법을 역이용하며 엄청난 공군지원아래 대승을 올리곤 했다.중공군은 당황하였다. 국부군과의 내전과 달리 미군과 한국땅에서의 전쟁은 몹시 판이했다.보급물자도 한국내 조달이 불가능하여 만주에서 수송해야하고 38선 이남까지 보급로는 지나치게 길어져 버렸다. 겨우 일주일이나 열흘분의 미숫가루로 연명하며 싸우는 중공군은 제공권도 없어 미군기에 보급품이 날라가기 일쑤이고, 눈덩이를 핥으며 굶주림을 채우다보니 설사 복통에다지독한 추위에 동상으로 줄줄이 쓰러져갔다.지치고 지친 사령관 펑은 잠시라도 정전(停戰)이 간절하여 마오의 뜻을 넌지시 떠보았다.그러나 다음날 날아온 전문에 “정전은 절대 불가, 적극 남진하라”는 불호령이 떨어졌다."즉각 제4차공세를 개시하여 대전~안동 이북지역 완전점령을 목표로 하라"는 것이었다.
서부전선 평택지역에서 시작한 4차공세가 리지웨이 군에 쫓기고 쫓기던 2월 하순,펑은 극비리에 베이징으로 날랐다. 마오는 야행성 습관대로 낮잠을 자고 있었다.“야간전투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영양실조 군대는 야맹증에 시달리고 잠도 못자고
식량도 없고 동사자가 속출합니다. 조선 병사들은 다 달아났고 도저히 버틸 수 없습니다.”단도직입적인 평의 호소를 듣던 마오는 느긋하게 장기전 계획을 설명해나갔다.“병력을 순환식으로 교대 투입한다. 우리 군도 소련제 무기로 많이 현대화 되었으니...”
마오의 속셈은. 이 전쟁을 이용하여 소련의 원조를 최대한 끌어내 중공군을 강화시키는 게
진짜 목표였다. 전쟁초기 포병 3개사단이 10개사단으로, 하나뿐인 고사포도 5개사단으로,
소련제 스탈린2형 탱크사단이 2개, 공군도 곧 참전할 수 있다면서 마오는 자랑하였다.“항미전쟁은 최강의 미군과 실전 훈련하는 학습장이야.
현대전 훈련은 군사학교보다 전쟁이 훨씬 효과가 크다.
쓸모없는 오합지졸들 정리해서 소련보다 강한 정예군 돼야지.”
베이징에서 3주일이나 피신 겸 휴식을 취한 펑도화이가 한국전선으로 돌아왔다.매일 보고받은 대로 서울까지 철수한 중공군은 힘겨운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
▶ 맥아더 해임...한국도 미국도 놀라고 분노했다맥아더가 돌연 해임되었다.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 4월 11일(한국시간) 맥아더를 유엔군사령관, 극동군사령관 등 4개직에서 해임하고 후임에 리지웨이 장군을 임명했다.
그의 해임은 본인에게 정식 루트를 통해 미리 통보하지 않은채 재가한 것이라
언론에 미리 새나가는 바람에 백악관은 새벽 1시 부랴부랴 기자회견을 열어
해임 성명을 발표하는 형식으로 얼버무렸다.맥아더는 도쿄 사령부에서 라디오 방송을 들은 부관을 통해 자신의 해임 소식을 들었다.“하인도 이런 식으로 해고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맥아더는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다.중공군이 개입하자 맥아더 사령관은 만주 폭격과 중국 해안 봉쇄, 대만 국부군(國府軍) 참전 등을 계속 주장했다. 압록강 다리 폭파와 만주폭격을 제안했지만 트루먼은 거부하였다.왜 그랬을까? 트루먼이 내린 맥아더의 소환명령서에는 한국에서 공산주의 침략을 저지하되
전면전으로 비화되는 것을 막고 3차 대전을 예방하는 ‘제한전’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우리의 당면문제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정책을 어떻게 하면 전면전 없이 저지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정부와 또 유엔에서 우리와 함께 협력한 다른 나라가 전면전 없이 공산주의와 그 계략을 저지시킬 수 있는 최선의 길은 바로 한국에서 적을 쳐부수는 것이다.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제한전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즉 군인들의 귀중한 생명을 보호하고 우리나라와 자유를 사랑하는 국가들의 안보가 무모한 행동으로 인하여 위험 속에 빠져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리고 3차 대전을 방지하기 위하여서이다. 나는 맥아더 장군이 이러한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수많은 사건을 통해 알고 있다. 따라서 나는 맥아더 장군을 해임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맥아더의 생각은 처음부터 트루먼의 생각과 정면대치되는 것이다.
그가 추구한 승리는 한반도 공산세력의 섬멸과 자유통일은 물론, 공산주의가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반인류적인 붉은 사조의 세계적인 패배를 완성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3차 세계대전을 각오한 전면전을 벌여 지구상에서 공산주의를 말살해야 한다는 굳은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청년시절부터 교류한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의 철악과 완전 일치되었다.중공군이 39선을 넘자 휴전논의가 본격화되고 맥아더에게 중공개입 책임론이 일어났을 때,
맥아더는 백악관과 유엔의 휴전추진이 ‘자살적 유화정책’이라 보았고, 군비 대폭증강과 함께전면전쟁을 요구하는 편지를 미국 상원위원회에 보냈다.
이 편지에 백악관이 ‘옳다구나’ 들고 일어났다. 2차대전 영웅의 일방적인 독주에 모멸감마저 느끼던 백악관은 맥아더가 통수권자인 대통령을 무시했다는 ‘항명’ 낙인을 찍어 전쟁하는 장군의 목을 서슴없이 잘라버리고 말았던 것이다.‘파면’ 같은 맥아더 해임에 대해 미국인들은 충격과 분노를 폭발시켰다.
트루먼의 패배적 정책에 신물이 난 국민들은 전국에서 트루먼 허수아비를 불태웠고,
국제부두노조는 조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맥아더가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도착했을 때 50만 인파가 도심까지 도열해서 돌아온 영웅을 열렬히 환영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7백만의 시민들이 맥아더를 위해 꽃가루를 뿌렸는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귀국한 아이젠하워 환영인파보다 2배나 되는 숫자였다고 한다.전국의 여론조사는 국민 66%가 “맥아더 해임에 반대”였다. 공화당은 맥아더를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연설하도록 초청했다. 많은 사람들은 트루먼을 탄핵하라고 요구했다. 매카시 상원의원은 맥아더의 과시적 태도를 싫어했지만 트루먼이 ‘전쟁을 이기는 장군’을 해임하는 결정에 “이건 아니다”며 “한밤중에 트루먼이 달콤한 술에 취해서 말방했다”고 비난했다.4월 19일 미국 상하 양원 합동회의에서 맥아더는 다음과 같은 고별 연설을 했다.“한국만이 지금까지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공산주의에 대항해 싸워온 유일한 나라입니다.
한국 국민들이 보여준 대단한 용기와 불굴의 의지는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노예 상태를 택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무릅쓰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내게 한 마지막 말은 ‘태평양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전투 중인 여러분의 아들들을 한국에 두고 왔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모든 시련을 견뎌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이 모든 면에서 정말 훌륭하다고 주저 없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저는 그들을 보호하고 이 야만적인 분쟁을 명예롭게, 그리고 시간 손실과 인명의 희생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끝내고자 끝없이 노력했습니다. 점차 심각해지는 유혈참사는 저를 깊은 고뇌와 근심 속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이 용감한 젊은이들은 저의 마음속에, 그리고 항상 저의 기도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처음 군에 입대할 때, 20세기가 시작되기도 전이었습니다만, 그것은 제 소년 시절의 모든 희망과 꿈의 실현이었습니다. 제가 웨스트포인트 연병장에서 임관하던 그 날 이후로 세상은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저의 희망과 꿈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저는 그 시절 가장 즐겨 부르던 어느 군가의 후렴 한 구절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는 ‘노병(老兵)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 노래 속의 노병처럼 이제 저는 제 군 생활을 마감하고 사라지려 합니다. 신께서 의무에 대한 깨달음을 주신 바에 따라,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 애쓴 노병으로 말입니다.” -
▶ ‘맥아더 없는 전쟁’ 날개잃은 이승만의 길고 긴 고민미국 본토에서 일어난 맥아더 해임의 파문은 그보다 훨씬 큰 충격파로 한국을 강타하였다.중공군 참전 때도 충격은 컸지만 “맥아더 장군이 있으니까...중공군까지 깨부시면 더 좋지” 등
전쟁영웅에 대한 신뢰감은 미국민보다 한국인들이 더 컸다고 할만 하였다.그가 해임된 날 언론들은 1면에 사설을 써서 맥아더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표하고
‘맥아더 없는 전쟁’에 두려움과 불안을 쏟아냈다.
첫날 ‘애석함과 분노’를 담아 트루먼의 ‘한국전은 국지전’ 방침을 격하게 정면비판한 동아일보는 맥아더가 의회에 나와 연설과 증언을 하자 또 1면 사설을 써서 환호하였다.“공산주의를 세상에서 없애려던 맥아더 장군이 19일 미국 양원합동회의에서 침략자 중공 격퇴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한국전쟁을 조속히 종결해야 하고 그러려면 압록강 보급로 차단, 중국해안 봉쇄, 중국 본토 폭격, 타이완 국부군 동원 등을 강행해야 한다고 했다.”이러한 주장을 가리켜 전쟁광이라고 비난하는 인사들을 비난한 사설은 “군사전문가도 아닌 유엔 정치가들은 세계공산혁명을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혈동물과 타협을 하자고 설교를 하니 도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공산당을 체험한 한국국민은 공산주의자와 협상도 안될뿐더러타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중략)....그런데 유엔정치가들은 가망성도 없고 우리가 원치도 않는 이 협상을 부지하세월로 계속해야 한다니....감나무 밑에서 입을 벌리고 감이 익어 떨어지기를 기다리라는 말인가. 유엔은 왜 중공을 침략자로 규정하였나. 응징할 수 없는 침략자 규정이 무슨 소용인가. 김일성은 응징해도 모택동은 응징 못한대서야....(중략).... 맥아더 원수의
소신 피력은 한국국민의 소신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유엔 정치가들에게 각성제가 되기를 희망한다. 맥아더 원수의 소신피력은 맥아더 원수 해임이후 실망과 불안에 사로잡힌 한국국민에게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주는 것이다. 건투를 빈다.“ (동아일보 4월21일자)리지웨이가 스스로 ‘킬러작전(Operation Killer)’이라 부른 맹추격작전은 큰 전과를 거두어다시 찾은 서울에 돌아온 시민들은 “이러다 또 피란 가야하는 건가?” 불안 속에 웅성거렸다.소련이 전투기 3천대를 증파했다는 뉴스에다가 서울 북방 전투도 동부전선 전투도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답답함에 다시 떠나는 시민들도 많았다.“정말 38선에서 멈추는 거야? 통일도 못 보고 우린 고향에 못간단 말야? ”
“미국이 이번엔 중공에 한국을 팔아넘긴다면서? 그래서 맥아더 쳤다지?”1.4후퇴후 더욱 기승을 부리는 유언비어들은 갈수록 구체화되어 확산되더니 맥아더가 해임되자 ‘그것 봐라’는 듯이 아주 단정적인 체념으로 굳어져가는 양상이었다.망연자실했던 이승만은 우선 공보처장 이름으로 담화를 내야했다.“유엔군이 중공 침략군과 북한 괴뢰군을 무찌르고 적의 소위 철의3각진지를 분쇄하기위하여 북진공격하고 있는 이때, 세간에서는 38선 정전 운운하는 유언(流言)이 많은데 이것은 유엔군과 국군의 용전분투함을 무시하는 것으로 유감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유언비어에 정부에서는 여러번 주의를 환기시켰다. 마샬 국방장관은 금차 시찰에서 38선은 무의한것이라 하였으며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도 38선을 돌파한다고 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유언이 떠돌고 있음은 유엔 각국이 대한민국 국토통일을 목표로 노력하는 것을 노력을 모르는 유언비어이다.”거짓말이다. 유엔이 한국통일 노력을 한다고? 이승만은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통일 기관차 맥아더를 잃어버린 통일전쟁, 무슨 수를 써야 미국을 압록강까지 몰아붙일 수 있단 말인가? 세기의 전략가 이승만의 새로운 고민이 시작되었다. 머릿속은 터질 것만 같다.길고 긴 고민의 결과는 무엇으로 나타날 것인가. 다음해 '부산정치파동'도 그 하나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