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여년의 광음(光陰)이 꿈결같이 흘러갔다

    나는 귀국 후 나라의 고마운 혜택을 받아 서울대병원 내과 과장인 한용철 박사가 주치의가 되고, 그 외 저명한 과장(科長)들로부터 정성스러운 치료를 받았다. 덕분에 1년 후에는 건강을 완전히 회복하여 자유를 만끽하면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세월이 가는 것은 화살 같이 빨라서 20여년의 광음(光陰)이 꿈결같이 흘러갔다. 2002년 초 어느날, 서울시 부시장과 한국해외건설협회장을 역임한 홍순길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홍순길 회장은 1960년대 후반기와 1970년대 전반기에 사이공의 주월 한국대사관 건설관으로, 경제공사인 바로 내 밑에서 여러 해 우수하게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영어에 능통하고, 통도 크고 업무추진력이 뛰어났으며, 정의감이 강한 건설관계 외교관이었다.

     

  • ▲ 오랜 억류생활 끝에 극적으로 풀려나 김포공항에 내릴 때의 모습 ⓒ 뉴데일리
    ▲ 오랜 억류생활 끝에 극적으로 풀려나 김포공항에 내릴 때의 모습 ⓒ 뉴데일리

    ◆ 20년 전 원수 즈엉징 특(楊政識),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최근 베트남에 갔다가 그곳에 있는 한국 교민으로부터 들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1975년 사이공 함락 후 나를 체포하여 투옥시키고 신문한 즈엉징 특(DUONG CHINH THUC, 楊政識)이 주한 베트남 특명전권 대사가 되어 곧 서울에 오게 되는데, 그가 한국 교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했다. 즉, 베트남 치화형무소에서 이대용 공사는 자기 나라를 위해 아주 죽을 각오를 확실하게 하여 굴복하지 않았다, 그가 당당하게 끝까지 저항하는 것을 보고 적이지만 큰 감명을 받았다, 자신은 이 훌륭한 애국자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홍순길 회장의 말을 듣고 나는 “홍회장, 참 별일이 다 있구려. 하필이면 그 사람이 왜 여기에..... 자기가 한 짓이 있어 서울에서 보복을 당할까봐서 예방책으로 그런 소리를 하는 모양이구려. 존경은 무슨 존경, 사실이 그렇다면 그때 나에게 잘해 줄 것이지. 이제 와서 무슨 군소리를..... 하여튼 세상이 많이 바뀌었소. 그 사람이 여기에 대사로 온다니.....”

    나는 홍회장과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고 송수화기를 내려놓았다. 한·베트남 국교수립 후 베트남을 다녀온 사람들로부터 1975년 ‘튀기’라는 별명으로 한국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즈엉징 특에 관한 소식을 나는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김일성대학과 김책공과대학에서 공부했으며, 북한주재 베트남 대사관 서기관으로 평양에 부임하여 현지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특명전권 대사가 됐으며, 평양에 20년가량 머물렀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혐오감을 느꼈다. 내가 옥중에서 그들의 학대를 받는 초라한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1975년 10월 3일 ‘ 광대뼈’와 ‘튀기’가 나를 체포하여 치화형무소에 쳐 넣을때 나에게 허용된 옷가지는 양복 긴 바지 하나와 반바지 하나, 남방셔츠 하나와 팬티 석장, 러닝셔츠 석장, 그리고 비닐로 된 샌들 한 켤레가 전부였다. 가죽 구두도 양말도 없었다.

    안닝노이찡 요원들에게 끌려가서 북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3호 청사) 요원들 앞에서 신문받을 때, 그들은 좋은 옷에 가죽구두를 신고 고급 의자에 앉아 있었다. 멋진 책상들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나를 3미터 반 쯤 떨어진 곳에 놓인 녹슬고 찌그러진 쇠 의자에 앉혔다. 나는 짐승처럼 맨발에다가 낡은 샌들을 신었고, 때가 낀 꾀죄죄한 남방셔츠와 구겨진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다.

    영양실조의 얼굴에 깎지도 못하고 빗질을 못해서 헝클어진 머리칼이 부수수 했다. 안닝노이찡 요원들이 나를 신문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다른 것은 안닝노이찡 수사과장은 군복에 미제 45구경 권총을 차고 군화를 신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신문할 때 마치 내가 총살언도를 받고 사형집행을 기다리는 사형기결수인양 취급했다. 내가 사상전향을 하고 그들의 지시에 무조건 고분고분 머리를 조아릴 경우에 한해서 사형집행을 재고한다는 투였다. 이는 마치 로마시대에 노예가 도망쳤다가 붙들려 와서, 사자 밥이 되기 전에 귀족들 앞에서 신문을 받고 있는 꼴과 다를 바 없는 아주 초라한 나의 모습이었다.

    그런 자화상을 회상하면 비감해지곤 한다. 그래서 나는 그 모습이 되살아나는 화두가 나오면 싫었다. 그런데 그때 나에게 몹쓸 짓을 한 3인방의 한 사람인 ‘튀기’가 대사가 되어서 서울에 온다니, 이만저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베트남은 1986년 12월 공산당 제6차 전당대회에서 웬반린이 새로 서기장에 취임하여 종래의 독선적이고 폐쇄적죽의 장막 노선을 과감히 버렸다. 그리고 개혁개방인 도이모이(=쇄신)정책을 채택하여 정치수용소를 모두 없애버렸다. 상당한 자유가 보장되었고, 외국자본을 유치하니 1990년대에는 연평균 7.6퍼센트의 경이적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2001년 12월에는 헌법을 개정하여 지속적 개혁추진을 위한 법적 토대를 구축하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법의 지배를 강화했다. 베트남은 이제 눈부신 발전을 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와는 구원(仇怨)을 깨끗이 씻어버리고,  1992년에는 국교를 정상화하여 하노이와 서울에 각각 대사관을 설치했다. 그리고 제3대 주한 베트남 대사가 이번에 부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시달리며 마음이 괴로웠다. 단순하게 감정에만 치우쳐서 원한과 복수의 단순 측면에서 따진다면 하늘이 주는 천재일우의 복수 기회가 20여년 만에 드디어 온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었다. 그때 그 엄청났던 양국 간의 증오의 불길은 이제 완전히 꺼지고, 당시의 상흔도 이제는 찾을 길이 없다. 옛날은 옛날이고 지금은 지금이다. 내가 이제 와서 복수를 한다는 것은 나의 자유조국에 큰 누를 끼치는 일이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혹시 표가 안나는 복수의 방법은 없을까?

     

  • ▲ 오랜 억류생활 끝에 극적으로 풀려나 김포공항에 내릴 때의 모습 ⓒ 뉴데일리

    <6.25와 베트남전 두 死線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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