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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국당 권영진 대구시장 당선자는 1962년 경상북도 안동 남선면에서 태어나 산골소년이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전근이 잦아 남동생 둘과 함께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 유년시절, 할머니 밑에서 자라, 대학원에서 하고싶은 정치학 전공
권 당선자는 중학교까지 안동에서 학교를 다녔다. 늘 아버지가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 보다 큰 도시로 가서 공부를 해야 된다”의 가르침에 따라 대구 청구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도시에서 그는 처음으로 부모님 곁을 떠나 경험한 하숙생활, 새로운 친구들과의 교제, 중학교 시절 상상도 하지 못할 정도의 학업경쟁, 안동에 비해 수십 배나 번화했던 도시의 풍경에 그는 방황의 연속이었다.
이후 그는 더 큰 뜻을 위해서 대학을 서울로 진학했고 고려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했지만, 영어보다는 사회에 더 관심을 가져 정치, 경제, 철학 등을 영어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다.
대학원에서 결국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전국 최초로 대학원 총학생회를 창립하고 초대회장으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통일원 통일정책보좌관을 지냈다.
권 당선자는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권유로 정치권에 입문해 2002년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의 정무·공보보좌역으로 활동했지만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이후 2004년 총선에 출마했지만 탄핵의 역풍 속에서 약 2,000표(1.9%) 차이로 아쉽게 패했다.
한나라당 노원(을) 위원장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던 중 2006년 오세훈 서울시장의 당선에 일조하면서 만 43세에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2008년, 18대 총선에 출마해 당선된 그는 교육과학기술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대학등록금 인하, 만 5세 무상유아교육 실현 등에 앞장섰다. 정치 선진화 실현을 목표로 18대 국회 민본21 창립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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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홀홀단신 대구시장에 도전해 성공
권 당선자는 지난 2014년 제6회 지방선거를 앞두고 홀홀단신 대구에 내려와 시장직에 도전장을 던졌고 주위에서는 모두들 무모하다고 말렸지만, 이변을 연출하며 당내 경선에서 새누리당 대구시장 후보로 선출됐다.
당선 후 그는 전임 시장들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고 많은 성과 또한 달성했다. 특히 친환경첨단산업도시로의 대전환에 기틀을 마련했는데 미래형 자동차·물·의료·로봇·에너지 분야를 신성장 동력으로 삼고 기존 800만평의 산업단지에 더해 신성장 거점 산단 600만평을 신규로 조성했다.
게다가 지난 4년 동안 유치한 기업이 164개, 투자규모는 2조 1천억 원에 이르며, 이 중에는 시가총액 7조원에 이르는 현대로보틱스, 국내 굴지의 석유화학기업인 롯데케미칼을 유치했다.
재선에 무난히 성공할 것만 같았던 그에게도 시련이 왔다. 대통령 탄핵 이후 한국당 지지세가 대구에서도 무너졌고 민주당의 돌풍도 거셌다.
지난 5월31일 출정식 후 예기치 않은 사고로 곤욕을 치렀고 그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갔다.
그는 “지난 4년은 희망의 씨앗을 뿌렸고 싹을 틔우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4년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수확해 시민의 삶을 바꾸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어 그는 대구를 미래형 첨단도시로 탈바꿈시키겠다고 했다.
또 대구·경북 통합신공항 건설로 대구를 세계 어디나 갈 수 있는 관문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통합신공항이 건설되면 고도제한과 소음피해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북구·동구·수성구 일원은 새로운 도시 계획 하에 곳곳에서 재건축, 재개발이 활기를 띄게 될 것이고 강조했다.
주위에서 권 당선자를 두고서는 “정치인 권영진의 꿈은 재선시장이 끝이 아니다. 재선시장을 발판삼아 더 큰 일꾼으로 나라를 위해 역할을 할 것”이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