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병 중에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던 김두한 경북매일신문 국장 별세33년의 대기록... ‘울릉독도’ 애정·철학 남기고 영면
  • ▲ 고 김두한 경북매일신문 경북부 국장ⓒ뉴데일리DB
    ▲ 고 김두한 경북매일신문 경북부 국장ⓒ뉴데일리DB
    울릉도와 독도를 향한 남다른 애정을 갖고 마지막 순간 까지도 사명을 지킨 김두한 경북매일신문 경북부 국장이 별세했다. 향년 71세.

    울릉도 토박이인 그는 1992년 1월 1일 경북매일신문에 입사해 33년간 ‘울릉·독도 알리미’를 자처, 현장 취재 원칙을 바탕으로 수만 건의 기사 발굴·생산을 통해 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기록하는 등 독자의 알 권리 제공에 그 누구보다 앞장선 기자였다.

    특히 투병 중이던 올해에만 칼럼·기고문 등 특집 형식의 기사를 20여 편 이상 생산 하면서 마지막 순간까지 취재와 집필을 멈추지 않았다. 고인이 남긴 제하의 기사 '울릉도 오징어, 이제는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돼야', '울릉도 저동항, 스파보다 중요한 건 어민의 땀', '울릉도 나리마을, 유엔대표 관광마을로 선정돼야', '정부, 도서민 삶의 질 향상과 이동권 보장 위해 선사 지원 필요' 등 에는 지역 현실 진단과 정책 대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울러 고령화·저출산 등에 따른 인구 감소와 기후위기 속, 어려움에 놓인 울릉도의 농·어업, 섬 주민 해상교통 이동권 문제, 독립적 행정 체계 유지에 대한 우려 역시 고인이 생의 마지막 까지 붙잡고 있던 주제였다. 황혼열차를 타고 하늘 무대로 가기 전에도 하루 전까지도 ‘울릉도 지역 활력의 새 거점 자연 GREEN파크’라는 제하의 기사로 독자 알권리 제공에 대한 남다른 집념을 보였다. 

    김 국장은 민족의 섬 독도에 대한 취재에서도 굵직한 성과를 남겼다. 일본 고문헌 속 독도 관련 기록을 발굴해 기사화 했고, ‘독도에서는 울릉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일본의 억지 주장에도 현장 취재·검증을 통해 사실이 아님을 입증했다. ‘독도 가수’ 정광태 씨는 자서전에서 김 국장을 ‘울릉도·독도 전문기자이자 민족기자’로 소개하기도 했다.

    경북지구JC특우회 독도수호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한 그는 또한 독도를 동해의 외딴 섬이라는 일반의 인식과 다르게, ‘울릉·독도’라는 단어로 독도를 자주 표현한 기자였다. 독도는 울릉도의 부속 섬이라는 관점에서 울릉도와 독도를 연계해서 함께 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기자의 마음이었다.

    또한, 그는 기자이기 이전에 울릉도·독도 현장의 사람이었다. 울릉군산악연맹 창립회장을 역임, 산악인으로도 활동했고, 전국 산악스키대회와 각종 산악행사를 통해 울릉도의 산림·생태 관광 활성화에도 힘을 쏟았다. 겨울 스키페스티벌, 등반대회, 트래킹센터 건립, 민간 산악구조 역량 강화 필요성 또한 그가 생전 꾸준히 강조하던 과제였다.

    무엇보다 고인은 지난 33년간 한 신문사에 재직하면서 수만 건의 기사를 생산, 독자와 동고동락했다. 그래서 그는 지역 언론계에서 오랜 경력과 높은 평가를 받는 원로 기자에게 부여되는 명예 호칭 ‘대기자(大記者)’ 임이 분명한 이유다.

    남한권 울릉군수는 “고인은 울릉과 독도를 지극히 사랑했고, 숨을 거두기 이틀 전까지도 글을 쓰신 불세출의 기자였다”며 “울릉 독도를 위해 평생을 바친 분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지역사회와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에서도 독자들의 애도가 이어지고 있다. “울릉 독도를 그렇게도 사랑하던 기자, 영원히 잊지 않겠다”, “참으로 따듯한 사람, 사회적 약자의 시선에서 지역을 바라봤고, 조금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은 울릉의 산 증인이었다” 등의 추모 글이 잇따르고 있다.

    고인은 생전 “기사를 쓰다 편히 잠들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처럼 그는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명을 다한 ‘대기자(大記者)’였고, 울릉 독도의 미래를 놓지 않았다.

    울릉도와 독도를 함께 바라보는 그의 관점, ‘울릉독도’라는 단어에 담긴 남다른 애정과 철학은 이제 남은 이들의 몫으로 이어진다.

    고 김두한 국장의 명복을 빕니다.